Rembrandt House Museum - 암스테르담(네델란드)
*주소 : Museum Het Rembrandthuis, Jodenbreestraat 4-6, 1011 NK Amsterdam
*교통 : 트램(전차) 9번, 14번을 타고 Waterlooplein에서 내림. 또는 지하철 Nieuwnarkt 역에서 내림.
*전화 : (020)624-9486
*관람시간 : 월 ~ 토요일 AM 10시 ~ PM 5시, 일요일, 공휴일 PM 1시 ~ PM 5시
*웹갤러리 : http://www.rembrandthuis.nl
17세기 저택 그대로 보존된 미술관
렘브란트(1606 ~ 1669)의 집이 미술관으로 개축된 것은 1911년이다. 현재 미술관은 렘브란트 생전 당시의 모습 그대로 가구×집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는 1656년 파산한 렘브란트의 재산내역을 꼼꼼하게 기록한 감정인의 치밀함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대표작들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렘브란트 미술관에는 사물의 진실을 추구한 그의 예술의 진가를 더욱 발휘하는 흑백의 에칭판화 250여 점과 드로잉, 그의 제자와 선생 피터 라스트만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네덜란드는 동화 속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에 불과하지만 미술사 속의 네덜란드의 위상은 좁은 땅덩어리와는 달리 '작은 제국'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인근 강대국의 입김에 불안한 역사를 전개하여 왔지만 미술사에서 만큼은 뛰어난 업적을 남겨 '유화기법의 창시자' 반 아이크 형제, '빛의 화가' 렘브란트, '불운의 천재' 반 고흐, '현대 추상회화의 아버지' 몬드리안에 이르기까지 네덜란드가 배출한 대가들의 발자취는 화려하기만 하다.
특히 렘브란트가 활약했던 17세기 네덜란드는 조선과 무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시장경제의 태동과 합리주의사상, 신교권 공화국으로서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가장 극대화 되어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농부도 그림을 살 수 있는 풍부한 경제력과 미술에 대한 대중의 각별한 애정을 바탕으로 타 국가들의 화가들과는 달리 가장 먼저 르네상스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리얼리즘에로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러한 네덜란드 미술 중흥기의 정점에 '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있었다.
영광의 세월과 쓸쓸한 최후
1606년 유복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과 부를 누렸으나 렘브란트의 말년은 화구와 몇 벌의 옷만이 재산으로 남았을 만큼 지극히 초라한 것이었다. 자식들과 두 명의 아내와의 사별, 파산, 정부의 '혼인빙자 간음' 고소, 처가로부터 부인재산 탕진을 이유로 한 고소 등 굴곡 많은 인생을 겪은 그에게 있어 인생은 빛과 그림자의 그것이었으니 그의 예술이 추구했던 빛과 그림자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빛과 그림자, 그 속에 담아낸 진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두움, 이로 인하여 생기는 화면의 깊이감 그리고 그것에 비춰진 한줄기의 빛. 빛의 세례와 같은 인상파의 찬란함과는 달리 렘브란트의 빛은 새벽의 여명과도 같은 한줄기의 빛이다. 이 한줄기의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진실을 밝혀주는 광휘로써 압도적인 어두움 가운데 더욱 찬란하고 당당하게 그 빛을 발한다. 빛과 그림자 못지않게 그의 예술이 추구한 중요한 관심사는 사람과 사물의 표정이었다. 렘브란트는 인간의 표정을 통해 인간의 감정, 그 속에 담겨진 영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렘브란트가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이나 입의 특징을 표현하는 방식과 화면에 미묘한 분위기와 신비로움을 부여하는 세심한 명암구사를 통해서 였다. 그렇게 그려진 인물들은 꾸며지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인물의 그 자체를 진실되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여성을 그리는 데에도 마찬가지여서 렘브란트는 전혀 미인이라고 볼 수 없는 얼굴과 늘어진 가슴과 배를 가진 여염집의 평범한 여인을 표현하였다. 렘브란트의 여성상은 '추의 미학'이라고 불려졌을 정도로 당시 유행되었던 이상화된 여성미와는 차별화 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부유층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화가에게 제작하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자신의 외모를 미화시키기 바라는 의뢰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데에도 진실한 모습을 담고자 한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리얼리즘의 추구는 세상에 대한 진실과 통렬한 풍자를 간직한 채 풍경화, 인물화, 종교화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글/ 신을연(자유기고가)